[거침없이 연극리뷰] 김연민 작·연출 ‘전기 없는 마을’…"디스토피아의 근미래(近未來)를 향한 가장 연극적인 응답"
[거침없이 연극리뷰] 김연민 작·연출 ‘전기 없는 마을’…"디스토피아의 근미래(近未來)를 향한 가장 연극적인 응답"
  • 복현명
  • 승인 2024.07.1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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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요일 개막한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김연민 작·연출,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024년 7월 11일~8월 4일)의 극장 풍경이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임을 생각해보면 이 기다란 무대(무대디자인 남경식)는 관객들의 비일상적 감각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제법 괜찮은 예술적 시도였다. 사진=국립극장.
지난주 목요일 개막한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김연민 작·연출,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024년 7월 11일~8월 4일)의 극장 풍경은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임을 생각해보면 이 기다란 무대(무대디자인 남경식)는 관객들의 비일상적 감각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제법 괜찮은 예술적 시도였다. 사진=국립극단.

[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4명의 연극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저자 대경대 연기예술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편집자주). 

객석의 끝에서 끝까지 좌우로 기다란 무대였다. 100석 남짓한 객석은 무대를 따라 길게 배치돼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의 질감처럼 무심한 벽면과 바닥이 가로로 이어진 무대 위 한가운데에 설치된 정체불명의 검은 구조물 덩어리가 눈길을 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떤 동물의 두상 같기도, 뭔가를 뿜어낼 것 같은 고장난 무기 같기도 했다. 

쓰임새를 가늠할 수 없는 삐죽이 솟은 구조물 옆으로 전선과 타이어, 고철 같은 폐기물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무대 하수 끝에는 투명 플라스틱 재질의 긴 의자 하나와 그 앞에 일인용 의자가 놓였다. 

반대편 상수 가장자리에는 동일한 재질의 일인용 의자 2개가 하수 쪽을 마주보며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다. 

난데없는 좌우로 기다란 무대가 당황스러웠다. 

공연 시작되기 10분 전에 여유롭게 입장했지만 남아 있는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황급히 맨 뒷줄 왼편의 남은 좌석을 찾아 앉았다. 

오른쪽 객석으로 옮겨 볼 요량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반대편 끝을 눈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다른 관객들의 무릎 숲을 헤치며 돌진할 자신이 없었다. 

자유석인지 모르고 로비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 아무 생각 없이 왼쪽으로 그냥 들어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측면에 앉아서 주요 장면을 충분히 관극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뒤이어 입장한 다른 관객들 역시 나와 비슷하게 약간의 불안을 수습하며 가장자리 남은 자리에 서둘러 앉아서 공연을 기다리는 듯했다. 

지난주 목요일 개막한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김연민 작·연출,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024년 7월 11일~8월 4일)의 극장 풍경이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임을 생각해보면 이 기다란 무대(무대디자인 남경식)는 관객들의 비일상적 감각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제법 괜찮은 예술적 시도였다.


◇상상으로 구현된 근미래의 무대 

국립극단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은 ‘과학기술과 예술’을 주제로 한 국립극단 작품개발사업(창작공감: 연출)을 통해 약 7개월의 담금질을 거쳐 무대에 올려졌다. 사진=국립극단.

이 작품은 ‘과학기술과 예술’을 주제로 한 국립극단 작품개발사업(창작공감: 연출)을 통해 약 7개월의 담금질을 거쳐 무대에 올려졌다. 

국립극단 보도자료에 따르면 리서치·스터디·특강·자문·워크숍 등의 창작과정을 통해 기술과 예술의 접점, 그리고 SF장르에 관한 깊은 고찰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공모를 통해 선발된 김연민은 ‘마을’이라는 공간과 지역에 대한 예술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이자 연출가다. 

2016년 한국연출가협회 신진연출가전 연출상, 2022년 젊은연출가상 등을 수상하며 최근 차세대 연출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에도 그는 변함없이 마을을 이야기한다. 

전작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일본 최대 재일한국인 집단 거주지 ‘아카이노(猪飼野)’를 통해 역사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혼란과 소외를 이야기했고(‘아카이노의 눈’), 일제강점기 ‘종로’(‘종로 갈매기’)와 일본 오사카 재일교포들의 ‘쯔루하시 시장’(‘쯔루하시 세자매’), 공단과 도시 사이의 의욕 없는 농촌 마을 ‘능길’(‘능길삼촌’)과 그린벨트 해제된 경기도 시골 마을(‘연꽃정원’) 등의 공간을 중심으로 체호프의 ‘사라져 가는 존재들에 대한 애처로움’을 오늘의 이야기로 극화했던 작가다.

지나간 역사와 과거의 고전을 통해 현재적 삶을 들여다보았던 이제까지의 작업과 달리 신작 ‘전기 없는 마을’에서는 도래할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상상으로 구현된 근미래(近未來)의 무대 위에서 생성과 소멸, 순환과 단절, 만남과 이별 등 삶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그려 보였다. 

한때는 유입하는 인구로 인해 융성했던 도시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소멸되지만 폐허 속에서도 자연은 묵묵히 꽃과 풀을 피우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김연민은 근원적인 삶의 진리인 순환과 재생의 이치를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창조한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진행했던 과학 개념에 대한 심도 있는 리서치 역시 이러한 작가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밑그림이었으리라. 

뉴턴의 제3법칙,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 열역학 제2법칙 등 유명하지만 쉬이 이해할 수 없었던 과학적 원리들이 정체불명의 키워드로 둥둥 떠다니지 않고 철학적인 사유를 거쳐 납득할 만한 서사와 주제로 작품에 수렴됐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뉴턴의 제3법칙에서 ‘우리가 세상에 던지는 모든 행동, 말, 생각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철학적 이치를, ‘어떤 시스템의 특정한 물리적 속성(위치, 운동량, 에너지 등)은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에서 ‘우리의 위치와 운명은 어떤 확정된 궤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작품의 대전제를, ‘이 세상은 계속 무질서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삶의 질서를 찾으려 애쓰지만 결국 모든 것은 변화하고 붕괴하며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된다’는 주제 의식을 이끌어냈다는 국립극단의 홍보는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엔트로피 법칙이 가르쳐 준 삶의 진실

이 작품은 ‘과학기술과 예술’을 주제로 한 국립극단 작품개발사업(창작공감: 연출)을 통해 약 7개월의 담금질을 거쳐 무대에 올려졌다. 
국립극단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 작품의 배경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근미래다. 사진=국립극장.

작품의 배경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근미래다. 

AI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 확보에 차질이 생긴다. 전기는 권력이 되고 전기를 차지하는 전쟁이 발발하여 자연은 파괴되고 인류의 생존은 위협받는다. 

전기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문제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다. 

‘전기가 가장 먼저 사라지는 마을’이라는 작가의 상상력은 AI를 동원해서 소멸이 예상되는 마을의 전기망을 끊는다는 극적 설정으로 발현된다. 

임무를 부여받은 AI가 전기를 끊어야 하는 마을에 도착하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작품은 3개의 차원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세계는 전기를 끊으러 다니는 재이(이다혜 분)와 이든(윤성원 분)의 세계로 두 번째 세계에서 만든 AI의 세계다. 두 번째 세계는 첫 번째 세계를 추적하는 재하(최하윤 분)와 기준(정원조 분)의 세계로 세 번째 세계의 영란(강애심 분)이 제공한 DNA데이터로 만들어진 세계다. 

마지막 세 번째 세계는 프로그래머 영란과 그를 돕는 원식(홍선우 분)의 세계로 현실 세계다. 

연극은 ‘NPC, 2차원’이라 명명되는 첫 번째 세계의 이야기로 시작돼 ‘S/W, 3차원’의 두 번째 세계를 거쳐 ‘Programmer(winter), 4차원’의 세 번째 세계에 도달한다. 

두 번째 세계의 재하가 세 번째 세계로 와서 영란과 원식을 만난 뒤 첫 번째 세계를 떠난 재이와 세 번째 세계를 떠난 영란이 새로운 세계에서 조우하면서 연극은 끝이 난다. 

재이와 이든에게 마지막 임무가 주어지면서 첫 번째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재이와 이든은 소멸하는 마을의 전기를 끊고 나서 자신들의 전기까지 끊어버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재이와 이든을 지켜보고 있는 재하와 기준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재하는 디지털ᅠ트윈(Digital Twin: 현실세계의 기계나 장비, 사물 등을 컴퓨터 속 가상세계에 구현한 것)에 이스터 에그(Easter eggs: 마치 부활절 행사처럼 프로그래머들이 부활절 토끼가 부활절 달걀을 숨기듯이 프로그램 내에서 장난을 친다는 뜻의 게임 용어)로ᅠ만들어둔 인물이 허망하게 소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영란이 프로그래머가 돼야 했던 이유가 밝혀진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를 잃었던 영란은 아이의 성장을 가상으로라도 보고픈 마음에 DNA데이터를 활용해 AI를 만들었던 것이다.

영란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AI로 설정됐다. 영란은 등장하는 AI들을 창조한 프로그래머로서 이들을 탄생시킨 어머니라 할 수 있다. 

근미래·인공지능·차원 이동·컴퓨터 프로그래밍·시뮬레이션 프로그램·다중 우주 등과 같은 설정을 거둬내면 이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세연극 ‘만인(Everyman)’과 같은 ‘여정극(station drama)’을 연상시킨다. 

국립극단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은 각 차원마다 2명의 인물들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데 개별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마다 하나만 남는다. 사진=국립극단. 

각 차원마다 2명의 인물들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데 개별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마다 하나만 남는다. 

첫 번째 세계에서는 이든의 전원이 꺼지고 두 번째 세계의 기준은 재하가 차원 이동한 뒤 컴퓨터를 닫는다. 

세 번째 세계에서 임무가 끝난 원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를 떠나기 전 인물들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마치 죽음을 앞둔 만인이 마지막 여행을 통해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극의 후반부에서 주로 다뤄지는 영란의 서사는 더욱 그러하다. 생명유지장치의 도움으로 살고 있는 영란은 전력이 곧 끊기는 상황에 직면한다. 

죽음 앞에서 영란은 프로그래머로서의 일생을 반성하고 자신이 창조한 AI들의 안녕을 걱정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 영원에 이르러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AI 재이와 대면한다. 

그렇게 뉴턴의 제3법칙에서 건져 올린 ‘세상에 던지는 모든 행동, 말, 생각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깨달음과 앤트로피 법칙이 가르쳐 준 ‘무질서한 세상에서도 새로운 재탄생을 고대하는’ 희망을 통해, 영란과 재이는 불가능해 보였던 동반 차원 이동을 성취해낸다. 

포말이 부서지는 푸른빛의 수평선이 무대 전면 영상으로 한참 동안 펼쳐진다. 

국립극단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 사진=국립극단.
국립극단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순간 극장 전체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극장에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영란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생의 시원(始原)을 더듬다가 문득 바다가 아니라 하늘 또는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바다를 AI 재하가 처음 본다면 이렇게 붕 떠오르는 느낌을 가졌을 것 같기도 했다. 영상이 사라진 고요한 무대 저 끝에서 첫 번째 세계의 재이가 나타났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거짓말처럼 등장한 것이다. 

재이는 AI가 아닌 영란의 오랜 그리움인 첫 아기처럼 모든 기억을 품고 있다. 영란이 데이터를 입력한 적 없지만 재이는 “난 다 기억해요”라며 또박또박 말한다. 그리고 영란에게 고향으로 함께 가자며 마지막 말을 건넨다. 

“그곳에는 우리들이 모여 살고 있대요” 단절과 소멸의 길고 긴 폐허 위에 재이가 맑고 또렷하게 말하던 ‘고향’ ‘우리’ ‘모여 살고’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여리지만 분명한 반딧불 같은 전언이었다.


◇라이다 센서의 극작이 성취해 낸 유려한 대사

김연민은 이번 작품을 바깥에서 산책하며 메모장만을 이용해서 기록했다고 밝혔다. 

작품 개발을 위한 기술 워크숍 중 알게 된 라이다 센서(‘Light Detection And Ranging’, ‘Laser Imaging, Detection and Ranging’의 약자. 레이저를 목표물에 비춰 사물과의 거리 및 다양한 물성을 감지할 수 있어 자율 주행의 눈이 되어주는 기술)를 이용한 3D 공간기록의 원리를 글쓰기에 적용해 본 것이다. 

3D 공간 기록 시, 광학 센서로 공간의 데이터 값을 가진 무수한 점(데이터 포인트)들을 기록하여 하나로 조합하면 완성된 공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마치 ‘원자’와 같은 수많은 메모들은 최종적인 합체와 분할 작업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수를 놓듯이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한 땀 한 땀 언어로 새긴 작가의 수고는 삶의 혜안을 담은 유려한 시적 대사로 성취됐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평면처럼 보이지만 저 너머에는 다시 우리가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죽음이란 걸 알고 있네” “산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야. 그래서 멋진 거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점으로 흩어졌다” “오늘은 내일의 향수가 될 거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진 너는, 이 모든 순간이 다중 우주라면, 네가 살아있는 세계도 존재할까?” 등 여기에 미처 다 적지 못한 아름다운 전언들이 극장에 울려 퍼졌다. 

국립극단의 신작 ‘전기 없는 마을'의 출연했던 6명의 배우(강애심, 이다혜, 최하윤, 윤성원, 정원조, 홍선우 등) 모두가 명확한 발음과 낭랑한 발성으로 극적 몰입도를 배가시켰다. 사진=국립극단.

출연했던 6명의 배우(강애심, 이다혜, 최하윤, 윤성원, 정원조, 홍선우 등) 모두가 명확한 발음과 낭랑한 발성으로 극적 몰입도를 배가시켰다. 

배우들의 또렷한 음성 덕분에 어려운 과학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도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비록 소극장이긴 했지만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은 배우의 육성을 오랜만에 시원스럽게 들어보니 역시 좋았다. 

거의 전 장면에서 모든 대사가 낱낱이 기억될 정도로 ‘듣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훌륭한 배우들 덕분에 자칫 뭉개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장면과 대사들이 생동하며 객석을 설득하였다. 

배우 캐스팅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좌우로 긴 무대를 자유로이 오가는 적절한 동선과 무대 전면을 활력 넘치게 만들었던 풍부한 영상(영상디자이너 오죠, 영상감독 전석희)도 큰 몫을 했다. 배우의 행동을 그대로 스크린에 출력하는 디지털 아트와 우주 속 먼지와도 같은 인간을 의미하는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s: 3차원 공간상에 퍼져 있는 데이터 점들의 집합)를 무대에 잘 스며들게 적절히 활용했다. 80분의 러닝타임이 찰나로 느껴질 만큼 행복한 관극이었다. 


◇디스토피아의 근미래를 향한 가장 연극다운 응답

이 글을 쓰기 전에 국립극단에서 제작한 홍보 영상인 ‘김연민의 Bag Stage’를 우연히 보게 됐다. 

김연민의 작가적 관심이 ‘사라지는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국립극단과 함께 과학기술과 예술의 접점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는 것, 아이폰의 스크리브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메모를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 등 창작 전반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작가의 말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작 다른 이야기였다. 

그가 평소에 안경도 2개, 지갑도 2개, 핸드폰도 2개 그리고 아이패드·휴대폰·컴퓨터까지 모두 들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전기 없는 마을’에서 인물들이 2명씩 짝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작가적 무의식의 소산일 수도 있겠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별로인 필자도 즐겁게 관극하였으니 과학과 공학을 전공하는 관객들이라면 더욱 재밌게 연극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극 ‘전기 없는 마을’은 8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계속된다. 

특히 7월 21일 일요일에는 공연 후에 연출가와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술가와의 대화’에 참여해 볼 수도 있다. 

“인생은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학습하고, 성장하며,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 놀라운 여정이, 바로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김연민의 무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정수진(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사,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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