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이에 올해 하반기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2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월간 ‘한국연극’과 계간 ‘한국희곡’ 편집위원인 조훈성 평론가, '한반도 음악극’ 저자로 ‘연극평론’ 편집위원인 정명문 뮤지컬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
‘거침없이 연극리뷰’ 편집위원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김건표 평론가(대경대학교 연기예술과 교수)가 맡고 있다(편집자주).
◇토론극으로 담아낸 ‘선택사 조력’
선택사(안락사) 조력의 윤리적 문제를 토론극 형식으로 담아낸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독일의 극작가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Ferdinand von Schirach)의 ‘고트(Gott)’(류주연 연출, 2024.9.6.-9.15,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가 그것으로 무엇보다 우리 연극계에서 흔히 다루지 않는 주제와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자살’과 달리,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행위를 두고 ‘존엄사’, ‘안락사’. ‘조력자살’ 등이라 하는데 연출가 류주연은 그러한 기존의 용어 대신에 ‘선택사’를 사용한다.
죽음에 이르는 행위를 미화하거나 폄훼하지 않는 가치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조력자살이나 안락사보다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토론극으로 진행되는 극 형식에 부합하는 용어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에서는 현재 조력자살이나 사망조력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나 바로 그 때문에 끊임없는 사회적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의사가 사람의 자살을 돕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윤리적인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마치 그러한 토론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윤리위원회의 공청회를 배경으로 해 그 토론 과정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형식을 취한다.
공청회 토론의 주제는 ‘리하르트 게르트너 씨의 존엄사’이다. 그러나 사회를 맡은 윤리위원회 위원장은 참석자들에게 다소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의사는 자기 선택사를 도와야 할까요?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일까요?” 그렇다. 이 공청회는 관객들에게 게르트너의 선택사 허용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선택사를 도와주는 ‘조력 행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이다.
◇법적, 의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택사
이 공청회는 게르트너의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다. 3년 전 아내가 뇌종양으로 사망한 이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게르트너. 아내처럼 목에 호스를 끼고 죽어가기 싫어서 선택사 조력을 신청했지만 불치병이나 통증이 없는,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연방기관뿐 아니라 자신의 주치의로부터 조력을 거절당한다.
신체가 건강한데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니. 어찌 보면 국가나 의사의 개입(거절)이 타당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게르트너는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처럼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움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법률자문위원 리텐 교수, 의학자문위원 슈페르링, 신학자문위원 틸 주교 등이 각각 법, 의학, 신학적 관점에서 ‘선택사 조력’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게르트너를 변호하는 비글러나 선택사 조력을 반대하는 윤리위원 켈러가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이어간다.
이처럼 이 연극은 죽음, 자살, 선택사, 선택사 조력과 같은 무거운 내용을 법적, 의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다층적으로 다룰 뿐 아니라 그것을 일반적인 드라마가 아닌 토론극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난해하거나 지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이 연극은 두 시간 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흥미진진한 토론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토론극 특유의 매력
토론극은 전통적인 드라마와 달리 플롯, 액션, 캐릭터 등과 같은 극적인 요소보다 논쟁과 토론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극 형식에 해당한다.
우리 연극의 경우 토론극의 전통과 저변이 약할 뿐 아니라 관객 역시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에 토론극을 제작하거나 관람할 기회가 많지 않다.
따라서 최근 들어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크리스천스’(루카스 네이스 작, 민새롬 연출)나 극단 산수유의 또 다른 공연작 ‘12인의 성난 사람들’(레지날드 로즈 작, 류주연 연출)에 이어서 이번에 공연된 ‘고트’와 같은 토론극이 관객으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주목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완성도 높은 희곡, 군더더기 없는 연출, 그리고 관록 있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겠지만 드라마와는 또 다른 토론극 특유의 매력을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토론극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논리적인 대사에 있다. 논리성, 타당성 합리성을 갖춘 대사로 관객을 설득할 때 관객은 관점을 달리하는 대립적인 인물 사이를 왕래하며 극 속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때 관객의 몰입은 드라마의 극적 세계에 동화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결국 관찰을 통한 사유와 성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정서적 몰입보다는 오히려 사고의 집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설득의 액션, 공감의 리액션
‘고트’의 경우 논쟁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인물에게 관객들이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일례로 게르트너가 아내의 죽음 이후 그 어떤 즐거운 일에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이성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면 죽고 싶다는 그 희망은 존중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할 때 관객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옳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의사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죽을 수 있다면 어찌 되는지, 첫사랑에 실패한 청소년이나 직장을 잃어 절망에 빠진 청년이 약물을 요구한다면 어찌 되는지 윤리위원이 반문할 때 관객들은 그러한 우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법의 영역을 대표하는 리텐 교수는 자유 헌법 국가에서는 살아야 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자유의지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자살이 소원인 사람이 젊든, 병자든, 노인이든, 법적으로는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소 비정하게 들리겠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의사를 대표하는 슈페르링은 의학의 목적은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을 뿐 자살을 돕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두 공감되는 주장들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들의 주장, 반박, 재반박이 이어지는 토론의 과정에서 수많은 자료가 근거로 제시되는데 그중에도 장애를 가진 자들을 살해했던 나치의 ‘안락사 운동’을 예로 들어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살인의 위험성을 지적한 부분은 충격을 안겨준다. 안락사 운동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인 사람, 이념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람, 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틸 주교와 변호사 비글러의 종교적 논쟁의 경우에는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주제로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진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회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살을 최악의 죄라고 믿었다는 주교의 주장에, 변호사가 성서의 두꺼운 책 어디에서도 자살을 정죄하거나 비난하거나 금지하지 않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는 성서의 내용뿐 아니라 역사 속의 종교 재판, 마녀사냥, 속죄와 대속 등등 두 인물의 종교 담론 속에서 살인과 자살을 포함한 죽음의 테마가 실로 다양하고도 심도 있게 다뤄진다.
◇막이 내리면 관객의 사유가 시작되는 연극, 토론극의 재발견
그러나 주교가 들려주는 30대 여성의 이야기는 의외로 관객들을 딜레마적 상황에 빠뜨린다.
실수로 사람을 죽게 만든 젊은 여성이 죄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죽기를 소원하는데, 그 여성의 죽음을 도와줘야 하냐는 것이다.
78세의 노인이 아니라 30대의 여성이 선택사 조력을 요구하다니.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는 듯하다.
이 연극은 모든 토론을 마친 후 큐알 코드를 영사막에 띄워서 실시간으로 관객의 의견을 묻는다.
“건강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약을 처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주체적 선택과 공동체의 윤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하는 질문으로서 그 결과보다는 설문에 참여하는 관객의 행동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찬성이든 반대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려면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문조사 이후 결과를 확인한 뒤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주는 대사를 하면서 막이 내린다.
선택사 조력에 대한 찬반 입장에 따라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사들이 각기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비글러의 대사가 가장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죽음에 관한 질문들은 결국 ‘우리의 삶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 질문이라는 것. 질문으로 시작된 연극은 오랜 토론을 거쳐 다시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관객에게 즉답이 아닌 오랜 성찰과 사유를 요구한다. 막이 내리면 비로소 관객의 사유가 시작되는 연극, 그것이 바로 토론극의 묘미가 아닐까?
류주연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간결하고도 절제된 무대 연출이 돋보인 경우였다.
관객을 강하게 흡인해 순식간에 설득시키는 배우들의 연기에도 박수를 보낸다. 토론극의 매력을 재발견시켜준 공연이라 할 만하다.
백로라(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