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이에 올해 하반기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2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월간 ‘한국연극’과 계간 ‘한국희곡’ 편집위원인 조훈성 평론가, '한반도 음악극’ 저자로 ‘연극평론’ 편집위원인 정명문 뮤지컬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
‘거침없이 연극리뷰’ 편집위원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김건표 평론가(대경대학교 연기예술과 교수)가 맡고 있다(편집자주).
◇“XX의 쓰레기풍선이 서울 상공에 진입하였습니다.”
“저는 ‘로풍찬’ 보러가네요”라고 말하면서 대학로 횡단보도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모 선생님과 만나 잠시 환담을 나눈다. 근데 “우웅-우웅-” 진동으로 긴급재난문자가 들어온다.
“XX이 대남 쓰레기 풍선(추정)을 또 다시 부양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께서는 적재물 낙하에 유의하시고 서울 진입시 재안내 드리겠습니다.[서울특별시청]”(2024년 9월 7일 18시 49분)
메시지를 읽는 둥 마는 둥극장으로 향한다. (사이) 열기 가득한 연극이 끝났다.
연우소극장을 서둘러 빠져나와 하행선 열차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열차 철로 위에서 “삐-삐-삐-” 위급한 알림 소리가 들려온다.
“XX의 쓰레기풍선(추정)이 서울상공에 진입하였습니다. 시민들께서는 적재물 낙하에 주의하시고 발견시 접근하지 말고 군부대(1338)나 경찰에 신고바랍니다.[서울시]”(2024년 9월 7일 22시)
‘로풍찬 유랑극장’(김은성 작, 문삼화 연출, 원안/류보미르 시모비치 작,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공상집단 뚱딴지 제작, 연우소극장, 2024년 8월 29일 ~2024년 9월 8일)을 근 십 년 만에 다시 보는 듯하다.
이번에는 ‘공상집단 뚱딴지’의 ‘로풍찬’을 만난다는 그 호기심과 기대감에 부풀어 극장을 찾았다.
“왔능가.”라는 전라도 사투리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1950년 6월 24일의 전남 보성 세재 마을을 찾았는데 돌발적으로 수신되는 문자메시지를 보더라도 왜 지금 다시 이 유랑극단이 천막극장을 세웠는지 알 것도 같다.
원작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의 시대나 이 연극의 시대나 극장 밖의 세계나 크게 무엇이 달라진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관객에게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특히 극중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결코 잃지 않는 ‘로풍찬’의 미소가 그래서 인상적이다.
이는 마주한 세계에 대한 항전의 정신과 의지가 이편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적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그 ‘초극’의 수행을 우리는 이 연극의 무대에서 함께 공감하고 경험하게 된다.
◇“하루걸러 시체에, 한 집 걸러 초상집인데 이런 데서 무슨 연극?”
문삼화 연출의 ‘로풍찬 유랑극장’은 이전보다 훨씬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협소한 소극장 공간 연출이라는 제약을 오히려 극중 유랑극단의 연극무대와 객석의 시점을 동일화시키는 수법으로 무대를 확장시킨다.
이 연극 안에서의 ‘천막극장의 무대’는 입장 통로에 두고 있지만 실상은 객석에 두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극장 가운데를 비워두고 그곳을 연극 안의 일상 세계로 지정해놓는 연출 방식 때문에 ‘로풍찬’과 단원은 그만큼 객석에 가깝게 맞닿아 있게 된다. 이 때문에 관객은 마치 그들 극단의 구성원이 된 것 같은 일체감을 갖게 된다.
그 덕분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무대 장면구성이 만들어지고 비워둔 무대 한가운데의 인물들의 내력을 집중해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인물에 대한 몰입도는 자연스럽게 이 연극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비극적 실상을 부각시키면서도 객관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연극 보는 재미를 넘어 마치 우리가 시종 이 연극의 코러스가 돼 추임새를 넣고 있으면서 연극이 아닌 극중의 참혹한 세계를 이 ‘로풍찬 유랑극단’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하루걸러 시체에, 한 집 걸러 초상집”인 세계에서 우리가 연극을 ‘하는 이유’와 ‘봐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묻게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시대적 배경으로한 ‘유랑극단’에서든 ‘로풍찬 유랑극장’에서든 우리는 꿈을 좇는 예술 지상주의적 염원만으로 이 연극을 가둬두지 않는다.
곧 역경과 시련 속에서 그려지는 ‘이상’, ‘환상’마저도 궁극적으로 우리 삶과 세계의 사유의 깊이를 확인 가능케 한다.
한국전쟁 발발 전날 전남 보성 새재마을의 ‘유랑극단’과 함께한 하룻밤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은 이데올로기 이념의 비극성에 그치지 않는다,
극단원이 펼치는 ‘웃음과 유머’의 신파적 연행성과 결합하여 그들만의 웃음 뒤의 강렬한 페이소스를 남기며 또한 ‘피창갑’이 피 칠갑 한 채 거적에 말린 시체를 죽창으로 찌르는 이 참혹한 난리통의 형상화도 이 연극의 극적 공간을 한층 특별하게 보여지게 한다.
바로 오늘의 소극장은 그들 유랑극단이 천막을 치고 ‘노민호와 주인애’를 무대에 올리는 또 다른 ‘극장 안’을 통해 극장 밖의 좌우 대립, 전쟁과 살육의 세계에서 벗어난 화해의 참 공동체로서의 이상향을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이 시대의 연극의 존재 의미와 가치, 우리에게 ‘극장’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가를 확고한 메시지로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공감은 기본적으로 통속적 멜로드라마의 정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연출적으로 지나친 감정의 표출조차 진부하지 않도록 인물 대사에서의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을 충분히 살려내는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좁은 극장의 좌석에 붙어 앉은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이 연극은 그 인물들의 질감 넘치는 사투리, 언어적 개성과 함께 상황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다.
◇“두 시간으로 줄인 천만 년을, 여섯 평으로 좁힌 억만 평을 가리고”
연극은 늘 무엇을 ‘줄이고 좁힐 것’인가를 고심한다. 그리고 그 줄이고 좁힌 것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바로 우리가 처한 정치적 현실을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극은 직설적으로 오늘의 세계 인식을 발화하지는 않는다. 또한 ‘유랑극장’의 하룻밤, 그 극적 사건 속에 역사적 사건 재연과 형상화에 급급해하지 않음으로써 진부한 극적 구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극중 “연극은 두 시간으로 줄인 천만 년을, 여섯 평으로 좁힌 억만 평을 가리고 있다네.”라는 대사가 새겨지는 것은 바로 그 ‘압축된 세계’와 ‘가려진 세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판가름에 있다.
그래서 극중 ‘극단’의 연극은 입출구 통로에 있고 이들의 극중 연극을 바라보는 ‘새재마을 사람들’을 무대 중앙에 두면서 객석의 관객을 바라보게 연출하고 있는데 이는 바라보는 쌍방이 저편의 새로운 세계 일면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무대 후면의 배경 천 조각을 하나씩 걷어내는 행위조차 일종의 우화적 기법으로서 이면의 세계를 하나씩 뜯어내는 것으로 바라봐진다.
이렇게 본다면 외부인으로서 이 마을에 찾아든 ‘로풍찬 유랑극단’은 오히려 ‘정치적’이지 않다.
정치적이지 않은 이들이 극장을 세우고 모여든 ‘마을사람들’의 정치적인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을 타자화된 존재로 확인시키면서 그동안 배제되고 왜곡되었던 바깥의 목소리를 비로소 복원, 회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대 한 가운데의 인물의 목소리에 대한 조명과 포커스, 점멸은 의도적인 연출 장치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정치성’이라 여겨진다. 이를 결부시킨다면 이 작품의 인물은 ‘주변인’이면서도 언제든 ‘주인물’이 될 수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다른 일반 작품에서 주인물 외의 ‘기타 등등의 인물’은 이 극장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대기 순서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극중의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존재를 전사하면서 극중 각 장면 구성에 맞춰 주인물로 나서며 입체화된다.
사실 질감 넘치는 이들의 토속어는 보다 극중 인물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보이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시공간에 대한 생경함 속에 작품 전개의 흥미를 유지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로풍찬 유랑극장’에서 눈여겨봐지는 것은 단원이 아니라 단원의 눈에 비쳐진 마을사람들이다.
‘피칠갑’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인 ‘창갑’이 본래는 공부밖에 모르던 순둥이였으나 반란군에 의한 아버지와 가족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분노의 화신이 되어 ‘빨갱이’ 잡는 백정이 되었다는 인물 설정은 다소 상투적이고 유형화돼 있다.
하지만 시체를 훼손시킬 만큼 살의를 풍기는 피범벅이 된 공포의 대상이 어떻게 변모되는가는 이 연극이 전달코자하는 메시지의 근간이기도 하다.
척척 꽃이름을 대는 ‘창갑’의 본성을 알아차린 극단원 ‘옥단미’가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극적 변화를 끌어가지만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 장면에서 그 구체화가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각 인물의 서사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히려 극 후반부에서 ‘창갑’을 대신하여 과거 유명한 엿장수였던 ‘김삼랑’의 변모가 강한 극성을 띠면서 그 인물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로풍찬’ 일행이 마을에 들었을 때 가장 반겨 맞이했던 인물이 바로 ‘삼랑’이었으며 과부인 처남댁 정순을 안타깝게 여기고 심지어 ‘창갑’의 야만스러운 폭력성까지도 그 인과를 따지면서 이해하고자 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가 ‘창갑’과 ‘단미’의 관계를 의심해 광기를 드러내고 저지르는 강간 시도나 엿가위로 머리를 잘라내는 강한 폭력성의 발현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성 상실의 본질을 캐고 있다는 점에서는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번 작품에서 연출적으로 많은 공을 들인 캐릭터가 있다면 ‘정순’일 것이다.
작품에서는 반란군에 죽임을 당한 군인의 아내이면서, 조카인 ‘칠성’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유형화된 ‘과부’의 모습으로 보여지면서 그 역할이 미미했으나 ‘상복’을 대신한 ‘다홍치마’를 통해 극이 심화될수록 터부시된 육체적 욕망을 발현함으로써 감춰진 열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인물이 된다.
이러한 극중 인물을 통해 우리는 사회순응적인 무력한 인간을 확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 변혁의 일 주체성을 가진 의지의 인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보여지는 것, 보여지지 않는 것 : 절박한 시대의 예술과 예술가
이제 우리는 이 극장 안의 또 다른 극장에서 유랑극단 배우가 아니라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들, 새재마을 사람들이 이 연극의 ‘노민호와 주인애’라는 것을 깨닫는다.
극단의 무대가 있어야 할 한가운데는 관객이 된 마을사람들이 차지하고 대사 목소리가 들려오는 통로를 바라보면서 전해지는 살아있는 감정의 동화와 표정은 객석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이되면서 이 연극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된다.
‘연극의 소용’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선명하고 뚜렷하게 전달했던 연극이 있었는가를 새삼 되짚어 꼽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연극의 열기를 수습하면서 얼린 생수병이 객석으로 전달되는 순간, 나는 이 절박한 시대의 예술과 예술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연극에 대한 강한 애착은 정서적 공감의 표식이다. 이 연극의 세계가 아무리 분열되고 딜레마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극적 상황의 속도와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그 틈을 비집고 던져지는 유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소극장 공간은 으레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그 삶의 무게와 깊이에 햇빛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연극 속 우리가 마주한 시간은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은 우리 개개의 소외와 고립에 대한 깊은 공감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연극에서 본 장면, 장면은 어쩌면 그 ‘어둠’의 겹치기일 수 있지만 누구 말처럼 그 어둠이 겹쳐진다고 해서 더 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은 마을공동체, 그리고 유랑극단에 드리워진 어둠이 중첩되는 것은 각자 몫의 고통을 일체화시키고 이를 나누면서 그 아픔을 덜하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은 아닐까.
1950년 6월 24일 이후의 일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새재 마을사람들에게는 더한 비극적 고통이 예비 돼있으며 유랑극단의 앞날조차도 밝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달라지지 않을, ‘내일의 고통’을 겪는 경험은 극장 밖의 관객이 감당해야할 앞으로 올 세계와의 힘겨운 겨룸과도 이어진다.
극중 마을의 ‘뚱딴지같은 축제’야말로 어쩌면 관객이 돌아갈 세계에서 구현해야할 축제,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 내야할 위로와 같은 의미를 찾게 한다.
‘로풍찬 유랑극장’을 바라본 마을사람들의 감성과 여운이 관객에게 마찬가지로 바로 ‘오늘’이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극 안의 사건은 바로 연극 밖의 세계에서 실현될 수 있으며 연극 이면의 가려진 세계에 대해 본질적으로 접근할 것을 객석에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재현의 무대가 어떠한 특별한 사건을 부각해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또 인물 간 더 이상의 관계 진전이 부재할지라도 이 연극의 시간에는 많은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상적 공동체의 복원과 회복의 가능성을 우리는 소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이 연극의 비극적 고통을 통해 연극 밖 세계를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의 표상들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 연극이 안에서든 밖에서든 인간적인 ‘고통의 공감’을 전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기점으로 인간적인 연대를 구축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날로그적인 극장 안의 극장, 극장 밖의 극장에서 우리는 미묘하지만 각자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극적인 인물, 극적인 경험, 그리고 ‘로풍찬’의 유랑
연극은 ‘극적인’ 인물의 세계이다. 그 ‘극적’이란 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하고 차별화된 상황과 경험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극적인 인간’이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세계와 오늘의 세계를 분리하기 일쑤이다.
내 앞의 ‘떠돎’의 연희패가 보여줬던 것, 우리의 뇌리에 그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남았던 것은 무엇보다 스러져가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극적 체험’을 통해 그들이 머물렀던 파탄난 세계를 살아야 하는 개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전환점’으로서 노천극장의 구실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연극으로 인해 모여 있는 마을 사람 각각의 새로운 자아상, 삶의 가치관의 변화는 분명한 연극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끊임없는 상호작용(interaction)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에게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한 연희패의 ‘유랑’의 의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로서 가벼이 봐지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과 선택이 곧, 이들이 딛는 걸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우리는 ‘예술’의 길과 힘, 그리고 수행의 자세를 체득한다.
극중 ‘로풍찬’의 슬랩스틱(slapstick), 걸리고 넘어져도 ‘짜라잔’하고 다시 일어서는 강인한 정신의 광대, 그 불굴의 정신력은 그렇기에 문제적 세계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의지로서 극장의 모든 이의 내면에 탄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극장 안, 메아리 울림이 되는 구절 하나를 옮겨본다.
“양을 모피 코트로, 곰을 털모자로 돼지를 구두로 둔갑시키는 이 세상에서 다시 모피 코트가 양의 울음소리를 내도록, 털모자가 다시 곰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도록, 구두가 다시 새끼 돼지를 낳도록 누가 할 것인가?”
그렇게 떠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누가 할 것인가”라고 대사를 외우며 나도 발길을 옮긴다.
조훈성(연극평론가) / 공주교대 교육대학원 강사. 월간 '한국연극', 계간 '한국희곡' 편집위원.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