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이에 올해 하반기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2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월간 ‘한국연극’과 계간 ‘한국희곡’ 편집위원인 조훈성 평론가, '한반도 음악극’ 저자로 ‘연극평론’ 편집위원인 정명문 뮤지컬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
‘거침없이 연극리뷰’ 편집위원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김건표 평론가(대경대학교 연기예술과 교수)가 맡고 있다(편집자주).
서너 살 남짓한 아이들이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구정물에 손발을 담그고 논다. 청년들은 돈이 될법한 폐자재를 찾아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헤집는다. 자연 발화된 쓰레기더미에서는 하루 종일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유독가스와 악취는 마을 전체를 무겁게 짓누른다. 빈곤을 떠올리게 하는 먼 나라의 일상 혹은 영화 속 비현실적 상황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세계 최대 플라스틱 소비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연극 ‘검은 산‘이야기다.
여자(이예주 분)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풀이 가득 심어진 작은 상자를 살핀다. 무대 위 풀로 덮인 상자는 두 개, 그 중 한 개에는 정교하나 작은 크기로 축소된 전원주택이 앉혀있고 다른 하나에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몇 개 박혀있다. 여자는 나뭇가지를 쓰다듬는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않는 그녀의 복숭아나무들이다.
지방의 소읍으로 귀촌한 여자는 전원주택을 짓고 복숭아를 가꾸는 전원생활을 꿈꾸지만 어찌 된 일인지 복숭아는 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여자는 나뭇가지가 박힌 상자를 파헤친다. 상자 밑쪽으로 검은 비닐이 끌려 나온다. 여자는 경악한다.
연출가 김낙형이 이끄는 극단 죽죽이 오랜만에 신작을 발표했다. 8월 22일부터 9월 1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공연 중인 ’검은 산‘(백하룡 작, 김낙형 연출)이다.
’검은 산‘의 원제는 ‘235개의 고원’이다. 쓰레기 산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2019년 당시 대한민국에 실재하는 쓰레기 산의 개수를 빗댄 제목이다.
연극 ‘검은 산’은 거대한 쓰레기 산을 쉼 없이 쌓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속도감 있게 담아낸다.
연극 ‘검은 산’의 무대에서 다양하게 등장하는 가볍게 들고 이동할 수 있는 크기로 제작된 미니어춰(무대 손호성)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연극적 재미를 불러온다.
미니어춰는 공간을 지정하는 소품에 머물지 않는다.
미니어춰와 그것을 간단하게 다루는 인물들의 대비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처럼 크기의 대비를 통해 커질 대로 커진 인간들의 욕망과 압도적인 힘을 효과적으로 환기한다. 인간이 다루지 못할 것은 없는 양, 무대 위 미니어춰들은 인물들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이동한다.
인간의 손을 벗어나 통제 불가능해진 것은 오로지 산처럼 거대해진 검은 쓰레기더미뿐, 그래서인지 쓰레기 산은 공연 내내 무대 뒤쪽의 검은 등선의 배경으로 자리할 뿐이다.
쓰레기 산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3월 미국 CNN 방송이 경북 의성군에 방치된 거대한 쓰레기 산을 보도하면서다.
그들은 방송에서 한국의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은 132킬로그램으로 세계 최대 수준이지만, 폐기물 정책은 쓰레기 산을 방치할 만큼 형편없다고 비꼬았다.
당시 의성군에는 폐기물 재활용업체인 ‘한국환경산업개발'이 들여온 폐기물 17만3000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높이 10미터 규모로 쌓인 이 쓰레기 산은 악취와 화재를 유발하고 폐수 발생 등의 환경오염으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등 지역민들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었다.
지역민들은 쓰레기 산의 자연 발화를 막기 위해 매일 악취를 참으며 쓰레기 산에 올라 물을 뿌려야 했다.
의성군은 쓰레기 산 처리에 나섰지만 곧 대한민국은 끔찍한 현실에 경악하게 된다.
경기도, 경북, 전북, 전남, 인천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의성군과 같은 쓰레기 산이 방치돼 있었고 1톤이 넘는 쓰레기 더미의 수만 해도 무려 235개에 달했으며 그 규모가 약 120만 톤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현대인의 삶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만든 쓰레기가 어디로 흘러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연극 ’검은 산‘은 실재하는 경북 의성군의 쓰레기 산을 무대 위 이성군 이성읍으로 옮겨왔다. 물론 쓰레기 산을 만든 인간의 욕망도 함께다.
쓰레기를 만든 당사자인 인간들은 정작 점점 거대해지며 증식하는 쓰레기 산 앞에서는 무력하다.
누군가는 쓰레기 산에 잠식당한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누군가는 분노를 표출하며 누군가는 거대한 이익을 챙긴다.
인간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변함없는 것은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쓰레기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이미 생겨난 쓰레기를 우리의 삶에서 완전하고 깨끗하게 소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인류의 삶이 대개 그랬듯 처리 곤란한 쓰레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약한 누군가의 삶 앞으로 옮겨질 뿐이다.
이를 반영하듯 극 후반부 대한민국에서 인도네시아로 옮겨진(수출된) 쓰레기를 처리하던 인도네시아 노동자는 이렇게 소리친다 “너희들 쓰레기 가져 가!”
경제성장을 위해 세계의 쓰레기통을 자처한 중국의 현실을 폭로한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왕구량 감독, 2016)는 중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중국 정부는 2018년 1월부터 폐플라스틱을 비롯한 각종 폐기물에 대한 수입 금지를 단행했다.
세계는 ‘쓰레기 쇼크'에 휩싸였다. 미국, 일본, 영국과 같은 세계 최대 폐플라스틱 배출국은 플라스틱 쓰레기의 대부분을 중국에 수출해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도 상당량의 폐플라스틱을 중국에 수출해왔기에 그 여파는 대단했다. 재활용품 수거업체들이 폐비닐, 폐스티로폼 등의 수거를 거부해 전국이 쓰레기 대란으로 몸살을 앓았고 2019년 2월에는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됐던 쓰레기가 반송되는 국제적 망신도 당했다.
선진국들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를 폐플라스틱 수출 대체국으로 삼았다.
재활용 폐기물과 함께 불법 폐기물이 밀반입되고 그런 쓰레기들은 현지인들이 생활하는 근방에 방치되거나 소각돼 심각한 피해를 유발하고 있다.
연극 ’검은 산‘의 익살맞고 희극적인 상황은 이러한 끔찍한 실제 상황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현실 상황과 극적 사건을 버무린 이야기를 100분 안에 소극장의 공간에 펼쳐놓기 위해 선돌극장의 빈 무대는 쉼 없이 전환된다.
무대 뒤쪽은 검게 칠해진 산등성이 포개져 있고 그 앞쪽의 빈 무대는 암전과 함께 사건이 진행되는 다양한 공간으로 변환된다.
이때 미니어춰 소품도 제 역할을 했지만 일인다역을 망설이지 않는 배우들의 속도감 있는 인물 전환도 한몫했다.
소나무, 복숭아 과수원, 당구장, 산불이 일어난 산, 방송국 스튜디오, 환경단체 사무실, 인도네시아의 폐기물 재활용 공장 등 다양한 공간이 그 공간을 지시하는 간단한 미니어춰와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 제시됐다.
쓰레기를 만든 가해자이자 쓰레기의 피해자가 되는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검은 산‘은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한 태도를 버리고 가볍고 희극적인 분위기를 고수했다.
이 땅에 방치돼 있던 쓰레기 산의 존재를 알린 것이 미국 CNN 방송이듯 ’검은 산‘의 사건은 이성환경연합회장인 최형식(이창수 분)이 지역신문인 이성신문의 기자 박우상(성홍일 분)에게 제보를 하면서 시작된다.
2021년 1월 세계 187개국은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처리에 관한 국제협약인‘바젤협약’개정안에 서명했다.
개정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플라스틱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는 조항이다.
하지만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을 저렴한 비용에 처리하고 그 차익을 챙기려는 인간의 욕망 앞에 바젤협약 개정안이 제대로 작동할리 만무하다.
연극 ‘검은 산’에서는 고속도로를 접한 땅값이 싼 지역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쓰레기 산이 바젤협약 개정안을 무시하고 동남아시아로 옮겨지는 작금의 상황까지 순식간에 진행된다.
제보에서 시작된 사건은 쓰레기 산을 만드는 배후 세력을 추적하는 기자와 그를 돕는 조력자 김미영(김성미 분)의 B급 영화같은 모험으로 진행되지만 사건의 해결이 권선징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매력적이다.
굵직한 사건 사이사이 명예욕과 물욕, 분노와 복수심과 결탁하는 매우 인간적인 욕망이 서브텍스트처럼 작동해 쓰레기 산은 결국 우리 모두의 욕망의 결과물이라는 것, 하여 그것의 해결은 탕진만이 쉬게 할 인간의 욕망의 멈춤에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희미하게 환기한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극작가 백하룡은 뻔할 수 있는 신문기자의 좌충우돌 고군분투를 때로는 인간적 욕망으로 때로는 뜬금없는 사명감으로 드러내는 한편 지루해질 법한 극의 말미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도록 반전도 잊지 않았다. 백하룡의 꼼꼼한 극작 솜씨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연극 무대의 본질인 문제적 인간의 ‘행동’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듯한 요즘의 화려한 연극 무대에 비하면 ‘검은 산’의 무대가 다소 조잡하고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투박함이 주제를 다루는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연극 ‘검은 산’은 기후변화 위기, 환경오염, 포스트휴머니즘을 소재로 한 연극들이 자주 드러내는 한계 즉 디스토피아적 절망에 잠식되거나 아직은 담론에 불과한 이상주의에 함몰되지 않는다.
대신 지금 우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쓰레기 생산의 일상이 곧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또 하나의 생태적 순환임을 스토리텔링한다.
쓰레기 산이라는 전지구적 문제와 인물들의 미시적 일상이 서로 작용하며 진행된다.
이는 인간 혐오라는 손쉬운 해소에 머물지 않는 성찰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성찰하며 지속가능한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김기란(연극평론가)/ 연세대 문학박사. 연극평론가,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