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4명의 연극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저자 대경대 연기예술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편집자주).
단단한 공연을 위한 과정 공유 정도로 시작된 희곡 ‘낭독’이라는 방식이 어느새 공연의 한 형식으로 주장되는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다.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상상만발극장의 ‘믿음의 기원’ 연작 마지막 작품인 ‘그것은 너의 말이다’(박해성 작·연출)도 일견 그런 인상을 주는 공연이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이 둥근 원형으로 배치된 의자가 꽉 찬 공연장부터가 도무지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극적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없는 빈 무대에 가득 찬 의자라니. 게다가 의자가 놓인 모퉁이마다 설치된 희미한 조명을 제외하곤 공연장이 너무 어둡다.
마치 누군가의 깊고도 고요한 마음속에 들어온 듯 덩달아 가라앉는 기분이다. 이때의 누군가는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침잠 중인 특별할 것 없는 개별자일 것 같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상상만발극장이 2011년부터 연작으로 발표해온 ‘믿음의 기원’ 마지막 작품이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연극을 경험하는 방식을 '믿음'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고자” 놀랍게도 10년 이상 연작 작업에 매달려왔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구성된 익숙한 믿음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일 터인데 구체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다룬 ‘믿음의 기원 1’, 과학이라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다룬 ‘믿음의 기원 2’,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다룬 ‘스푸트니크’, 도덕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다룬 ‘도덕의 계보학’이 그것이다.
연작의 대미를 장식한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모든 결과에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을 뒤흔들려는 공연이다.
공연 제목인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며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인가?”라고 묻자 예수가 한 대답이다.
정해놓은 결과(답)를 끌어내기 위한 질문임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수가 인간에게 던진 이 문장을 제목 삼아 “기원이 기원을 묻는 기이한 믿음의 고리를 노출”하려는 기획 의도를 담아냈다.
◇독백인 듯 대화가 되는
누군가 앉아 주기를 기다리는 의자, 서로를 마주 보고 응시할 수 있도록 배치된 의자가 말을 건다.
앉고 싶은 데 앉으렴. 관객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자를 선택한다.
특별한 공연 시작의 표지도 없이 4명의 배우들이 오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백처럼 털어놓으며 공연은 진행된다.
그들의 말은 “내 발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라는 첫 장면의 독백처럼 어떤 이야기를 향하는지 알 수 없이 단절되고 분산되지만 묘하게 합쳐지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어두운 밤 숲길을 홀로 걷고 있다. 한 여자가 도심의 골목길에서 길고양이를 부른다.
또 다른 남자는 초면의 인사를 건넨다. 이들이 내뱉는 문장은 각각 분절되어 서로의 문장 안으로 끼어들지만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4인의 인물들 각자의 상황은 분절된 채, 허공을 떠돌다 묘하게 서로를 알아보고 이어쓰기는 형국이 되지만 결코 하나의 분명한 이야기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사방에서 등장해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거나 아무도 없는 텅 빈 의자에 앉는 배우들의 행동과 동선은 이러한 발화의 특성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은 독백에 멈추지 않고 대화처럼 겹쳐진다.
서로를 바라보는 법이 없는 이들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지만 실제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만을 말한다.
중요한 점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만을 각자 말하는 듯하지만 공연에서 그것이 대화처럼 흘러가는 것으로 감각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것은 너의 말이다’를 낭독이 아니라 공연이 되도록 만드는 극적 요소이다. 이제 그들의 말을 잘 들어봐야겠다.
◇각자의 고독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믿음에 대해
주인을 잃고 물건들만 남은 방, 대부분 잠든 신산한 밤 홀로 깨어 헤매는 골목,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깊은 산 속이란 서로 다른 공간이,
원형으로 둘러싼 의자 사이사이를 오가는 배우들의 동선과 그들의 말이 만날 때마다 입체화된다.
이토록 쓸쓸하고 고독한 각각의 공간에는 한껏 웅크린 내면을 부여잡고 있는 4인의 인물들이 있다.
이들의 공간은 따로 또 같이, 공유되기도 한다. 딸과의 전화통화 내용을 되뇌이며 주인 잃은 물건들을 정리해달라고 의뢰한 남자는 유품정리사 남자와 작은 방을 함께 둘러본다.
인간의 손길로부터 몸을 숨긴 길고양이를 찾아 어두운 골목을 헤매던 여자는 전봇대와 추돌한 자동차 안에서 한 남자를 발견한다.
도심에 날아든 야생새 흰머리오목눈을 영상에 담으려 골목을 살피던 남자는 순록과 이리라는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캣맘과 마주친다.
놀러 가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다 벤치에서 잠이 든 소녀는 벤치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 대화를 나눈다.
눈치채셨는가. 이들은 모두 고독한 존재다. 이들의 고독은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기인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결과에는 마땅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 더불어 모든 극적 상황, 행동, 사건은 인과율에 의해 구성된다는 연극의 본질에 대한 믿음에 따른 해석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 남자는 말한다. “거기선 답 못 찾아 내가 알아”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인물들의 연쇄된 행동을 통해 관계를 맺고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관계맺는 방식은 앞서 정리한 것처럼 우연에 의지한다.
꼭 그 남자가 그 여자를 만나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이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결단을 요구하는 고독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독한 상황이라는 결과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요점은 결단이 필요한 고독한 상황에 처했다는 유대감이, 이들의 독백을 대화로 만들고 상황의 서술을 사건이 되게 한다.
이들 각각의 현실이 다른 이의 현실과 만날 때란 가장 고독한 순간에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된다. 그것이 필연적일 수 없는 우연한 만남이기에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너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그들
4인의 인물들은 한 편 같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나 마치 하나의 인물인 듯 그들의 캐릭터는 어느 정도 일치한다.
유품정리사, 도심에 사는 야생새를 기록하는 청년, 인간에게 버려진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는 남자, 오지 않을 친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소녀 등 굳이 정리하자면 근대 사회의 제도적 삶과 죽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황에 던져진 자들이라고나 할까.
이런 맥락에서 극 중 굶주리지 않았음에도 새를 물어 죽인 고양이 이리에 대해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그냥 죽였어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밥은 충분했으니까 날개만 뜯고 발버둥 치는 걸 계속 구경했어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리고 두고 사라졌어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이유는 당연히 없지요.” 원인을 찾아 결과를 통제하는 것은 근대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다. 그만큼 분명하고 산뜻하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명백한 결과에 대해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때,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지를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4인의 인물들이 던지는 이 쓸쓸한 질문의 내용은 이제 관객들의 몫이 된다.
그러니 한 편인 듯한 4인의 인물이 상대하는 것은 의자에 앉아있는 무심한 관객들일 수 있다.
의자에 앉은 관객들 사이를 누비는 그들은 관객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4인의 인물들은 텅 빈 의자 주변을 배회하다 가끔 의자에 앉기도 한다. 그 자리가 관객의 바로 옆자리일 수도 있다.
내 옆에 앉은 누군가가 넋두리처럼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직 무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들을 준비’만 되어 있는 관객들을 한층 친밀하게 끌어당긴다.
그것은 익숙한 만큼 공고한 인과율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며 공연장 안에서 새로운 믿음을 함께 생성해가는 관계 맺기의 방식이다.
‘시간과 공간, 개연성과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무대의 응시’로 고독의 이유를 찾으려는 4인의 인물들의 심연이 어두운 공연장에서 분투한다.
그들은 행동하지 않고 각자의 고독한 상황을 조분조분 서술한다. 공연에서 행동을 대신하는 서술은 인물들의 내면이나 심리를 드러내는 데는 주효하지만 극적 긴장을 유지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말이다’에서 분절된 말들은 공연장을 떠돌다 가끔 만나고 그것들의 만남을 찾아내기 위해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들의 고독한 상황이 당연할 수 있는 이유는 찾을 수 없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 등퇴장을 반복하는 그들의 물리적 존재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할 가장 분명한 내용은 ‘나는 존재한다’는 간명한 사실이 아닐까.
김기란(연극평론가) / 연세대 문학박사. 연극평론가,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