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4명의 연극평론가의 앞으로 거침없는 연극리뷰를 연재하기로 한 것이다.
거침없이 연극리뷰 평론 필진은 월간한국연극 편집주간으로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인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인 숭실대학교 백로라 교수(연극평론가),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연극읽기 등 연극서적을 발간하고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 김건표 교수,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양학부 정수진 교수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편집자주)
‘그냥 콜리일 뿐이라는 한 로봇’의 순수함이 윤태호와 진호의 미성(美聲)으로 무대를 감쌌다. 앞 좌석의 아주머니는 연신 휴지를 뽑아 안경 너머로 눈물을 훔쳤다. 청각으로 스며드는 순수하고 따뜻한 느낌, 이처럼 안온한 감정을 느껴본 것이 언제인지 몸과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느낌이다. 유치하거나 뻔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했던, 로봇을 내세운 뮤지컬은 인간과 로봇의 교감이라는 예상 가능한 설정을 넘어, 안락사 위기의 한 경주마를 위해 스스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로봇의 주체적 선택을 보여줬다.
서울예술단이 제작한 뮤지컬 ‘천 개의 파랑’(김한솔 극작·박천휘 작곡·Greg Jarrett 편곡·김태형 연출,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5월 12일~26일) 이야기다.
2019년 출간된 후 15만 부 이상 팔린 천선란 작가의 SF소설 ‘천 개의 파랑’은 뮤지컬 개막과 비슷한 시기 연극으로도 공연됐다.
5월 16일부터 28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천 개의 파랑’은 러닝타임이 조정되고 개막이 연기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로봇이 연기한다’는 점을 내세운 연극 ‘천 개의 파랑’ 무대에 등장한‘콜리’는 신장 145㎝, 동그란 LED 패널 얼굴 위 초록빛 타원형 눈이 두 개 달린 로봇 배우였다.
사람의 조작이 필요한 반자동 로봇 콜리는 콜리와 비슷한 체구의 배우 김예은의 몸과 입을 통해 연기를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내장 배터리를 완충하면 6시간 이상의 공연도 가능하다니 로봇 배우 콜리의 등장은 인간의 몸이 오랫동안 독점해 온 연극무대가 직면한 혁신적 상황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에서 무용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2013년 내한한 일본의 로봇연극에서 충전된 로봇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2013년 창극 ‘장화홍련’에서 소리꾼이 연기를 보여줬을 때, 2011년 창극 ‘수궁가’에서 가면을 쓴 소리꾼들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어쩌면 연극무대의 배우, 배우의 몸의 존재 방식은 이미 변화를 시작했다 하겠다.
뮤지컬계에서도 다가오는 10월 브로드웨이 극장 무대에 서게 된 ‘어쩌면 해피엔딩’을 비롯해 ‘유앤잇’,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로빈’ 등 이미 2010년대 소극장 규모의 AI 로봇이 등장하는 뮤지컬이 공연된 바 있다.
“고독한 우리의 사는 모습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 콜리를 통해 반추하고자 했다”는 연극 연출가 장한새의 의도와 달리 원작의 주요 캐릭터인 말 투데이가 보이지 않았던 연극무대에서, 로봇과 인간은 중첩되기보다 서로 대비되며 오히려 그 차이가 부각됐다. 게다가 콜리의 가슴에 내장된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성은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고, 원작의 문어체 문장이 옮겨진 많은 대사 부분은 지루했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 연극적인 방식으로 구현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은 연극 ‘천 개의 파랑’의 아쉬움을 단단히 보강했다.
우선 로봇 콜리는 수공예 인형(puppet)으로 제작되어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함께 노출되는, 매우 연극적인 방식으로 구현됐다.
배우가 콜리의 머리 부분을 작동시키고 팔과 다리는 2인의 인형조정사가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콜리의 하체가 합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후 인형 부분은 퇴장시키고 이후 배우가 온전히 콜리를 연기하고 노래하는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관객들에게는 로봇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시키는 한편 무대에서 로봇이 연기해야 한다는 설정이 주는 제한과 불편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로봇 인형과 인간 배우의 몸이 무대 위에 겹쳐지고 합체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 콜리의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여기에 다르파, 안내로봇, 청소로봇 등 이미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로봇들을 서사 흐름에 맞게 등장시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 사회도 효과적으로 환기했다.
특히 연극 ‘천 개의 파랑’에서 로봇 연기에 집착하다 놓쳐버린 경주마 ‘투데이’의 연극적 구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경주마 투데이도 인형으로 제작됐는데 이지형 퍼펫디자이너는 구동 방식은 로봇 형태지만 인형조정사가 조종할 수 있도록 실물 크기의 말, 투데이를 제작했다.
결과적으로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은 서로의 관계 속에 인간, 기계 로봇, 동물을 동등한 비중으로 무대 위에 시각화함으로써 원작의 메시지인 인간-로봇-동물의 연대와 공존을 감각케 할 수 있었다.
인간이 모든 종의 중심에 자리하며 생겨난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적 경계는 사라지고 인간-로봇-동물의 교감과 연대를 통해 인간에게 쓸모에 따라 착취당한 한 경주마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선물한다.
“로봇과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역설적으로 찾을 수 있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무대적 상상력으로 전달하겠다”는 서울예술단 예술감독 이유리의 호언장담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장애가 있는 연재의 언니 은혜(송문선 분)는 경주마 투게더와 교감하고 장애인을 돌보는 한부모 가정의 어려움 속에서 일찍 철이 들어버린 연재(서연정/효정 분)는 로봇 콜리와 소통한다.
은혜와 연재의 엄마 보경(김건혜 분)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에만 몰두한다.
이들은 정작 가족이자 같은 종(種)인 인간과의 소통에 서툴고 때문에 충족되지 못한 애정을 동물과 로봇에게서 보상받거나 고립된다.
이런 극적 인물의 상황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각색자인 김한솔은 화재 진압 중 숨진 소방관 남편(최인형 분)을 인물로 등장시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엄마의 심리와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대화 상대역으로 구성했다.
서사장르인 소설을 극장르, 특히 음악극인 뮤지컬로 옮기는 만만치 않은 작업에서 서사적 서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장면 속에 인물의 관계와 상황을 제시한 각색 능력이 놀랍다.
◇극 중 콜리와 로봇, 배우들의 연기
극 중 콜리는 학습 칩이 잘못 삽입된,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는 유별난 로봇이다. 뮤지컬에서 캐릭터는 배우의 음색으로 환기된다.
콜리 역의 윤태호와 진호의 고운 음색은 특별한 연기 없이도 콜리의 순진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했고 곱지만 한결같은 힘이 담긴 씩씩한 음색은 밝고 명랑한 콜리의 태도를 드러냈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은 콜리가 경험하는 두 번의 낙마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놀랍게도 콜리의 낙마는 모두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 낙마는 투데이를 고통스런 빠른 속력으로부터 구해주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낙마는 관절을 다친 투데이가 마음껏 제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의도에서였다. 로봇이 동물을 위해 희생하는 자발적 선택은 ‘천 개의 파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은혜와 연재, 엄마와 은혜와 연재, 소방관 아빠와 화재 현장의 엄마, 이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자발적 선택으로 구성된다.
뮤지컬 넘버(musical number) 1,‘천 개의 파랑’, “당신들 모두 내겐 파랑이었죠. 천 개의 파랑은 당신들이에요.”는 이를 암시하는 노래이다.
이런 그들이 자기 앞의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콜리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콜리가 생각해낸 방법이란 뮤지컬 넘버 20, ‘천천히’에서 “어쩌면 우린 모두 달리지 않는 연습이 필요해”라는 가사로 불리듯 고단하게 견뎌온 따라가기 힘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리더라도 행복한 자신들의 삶의 시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150분의 러닝타임 중 절반 이상이 노래로 채워져 지루함이 없었던 뮤지컬 ‘천 개의 파랑’에서 특히 대부분 노래로 전달된 콜리의 대사는 이러한 정서를 담아냈기에 어떤 관객의 표현대로 “눈물 버튼”이 될 수 있었다.
두 번째의 자발적 낙마로 공중에 떠오른 콜리를 슬로우로 보여주는, 아름다워 더욱 처연했던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번 공연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행복은 고통을 잊게 한다고 믿는 콜리는 고여 있던 시간이 흘러 남은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향해 한 발 나설 때 행복할 수 있었다.
하여 바닥에 떨어져 수리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는 고통을 기꺼이 선택했을 것이다.
통제 어려운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질주하는 시간을 인간과 동물 태생의 자연적 시간의 흐름으로 돌려놓으려는 콜리의 선택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덧붙여 서울예술단의 특기이기도 한 LED와 영상을 적극 활용한 무대도 뮤지컬에서 기대할 법한 스펙터클을 제대로 충족시켰다.
다양한 장소를 압축한 만큼 많은 무대 전환이 요구됐는데 ‘흘러가는 공간’이라는 무대디자인 컨셉을 “수직과 수평, 그리고 천장과 바닥에 설치된 다수의 LED 패널로 표현(현수정 평론가)”했다.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은 최근 수년간 만들어진 대극장 창작 뮤지컬 중 단연코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김기란(연극평론가) / 연세대 문학박사. 연극평론가,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